제4장. 씨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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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5-18 02:30 조회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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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오씨(海州吳氏)는 고려 성종조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오인유(吳仁裕)는 송(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해 해주(海州)에 터를 잡았다.
오씨(吳氏) 중에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또 한 파의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있다. 이들은 고려 고종조 계단(契丹)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해주군(海州郡)에 봉해진 오현보(吳賢輔)의 후손들이다. 오현보(吳賢輔)는 신라 지증왕 1년 중국에서 건너온 오첨(吳瞻)의 24세손으로 전한다.
오첨(吳瞻)과 오인유(吳仁裕)와는 어떤 관계인지 역사적 문헌이 불확실해 고증하기 힘들다. 오인유(吳仁裕)와 오보필(吳寶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오인유(吳仁裕)의 후손들은 7세전후로 약 20여개의 파로 갈라진다. 8세 오반(吳潘)의 후손들은 찬성공파(贊成公派), 9세 오중수(吳仲守)의 후손은 사복사정공파(司僕寺正公派)로 분파했다. 9세 오희(吳僖)의 대 이후로는 양정공파(陽亭公派)를 이루었고, 9세 오처권(吳處權)의 후손은 용강공파(龍岡公派), 9세 오생운(吳生韻)의 후손은 생원공파(生員公派)를 이루었다.
7세 오사정(吳士禎)의 후손은 묘제공파(墓齊公派), 7세 오사운(吳士雲)의 후손은 지군사공파(知郡事公派), 7세 오사렴(吳事廉)의 후손은 사복사경공파(司僕寺卿公派), 7세 오광정(吳光廷)의 후손은 전서공파(典書公派)로 나뉘었다.
8세 오선경(吳先敬)의 후손은 사인공파(舍人公派), 8세 오선의(吳先義)의 후손은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8세 오강(吳綱)의 후손은 장춘공파(長春公派), 오서(吳瑞)의 후손은 해성부원군파(海城府院君派)로 분파했으며, 5세 오성(吳晟)의 후손은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9세 오국화(吳國華)의 후손은 징사공파(徵士公派)로 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14세 오정방(吳定邦)의 후손은 정무공파(貞武公派), 12세 오경순(吳景醇)의 후손은 신녕공파(新寧公派), 14세 오윤겸(吳允謙)의 후손은 추탄공파(楸灘公派), 14세 오윤성(吳允誠)의 후손은 월곡공파(月谷公派), 오윤성(吳允誠)의 후손은 서하공파(西河公派), 13세 오희철(吳希哲)의 후손은 학생공파(學生公波), 14세 오윤충(吳允忠)의 후손은 처사공파(處士公派), 14세 오윤해(吳允諧)의 후손은 만운공파(晩雲公派) 등으로 분파하였다.
‘문양공오연롱(文襄公吳延籠)’은 고려 예종 2년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고려조 인물에는 문양공(文襄公)과 이름이 같은 오연총(吳延寵)이 있다. 그는 공민왕조에 판삼사(判三司)를 지냈고, 아들 오반(吳潘)은 좌찬성(佐贊成)에 올랐다. 오강(吳綱)은 국자감진사(國子監進士)를 역임했다. 공양왕 때는 오광정(吳光庭)이 공조전서(工曹典書), 오성식(吳成式)이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다.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조선조에 문과급제 98명, 영의정 1명(오윤겸(吳允謙)), 우의정 1명(오명항(吳命恒)), 대제학 3명(오도일(吳道一) ㆍ 오원(吳援) ㆍ 오재순(吳載純))을 배출했다.
중종(中宗) 때 이조전서(吏曹典書) 오결(吳潔), 선조(宣祖)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오상(吳祥)(이판(吏判) ㆍ 청백리), 임진(壬辰)왜란 당시 남원성(南原城)을 사수했던 전라(全羅)방어사 겸 순천(順天)부사 오응정(吳應鼎)과 전라(全羅) ㆍ 경상도(慶尙道)병마절도사를 지냈던 오정방(吳定邦), 성리학의 대학자 오천민(吳天民) 등이 조선(朝鮮) 전반기 해주오씨(海州吳氏) 가문을 빛낸 명현들이다.
이중 오응정(吳應鼎)장군 일가는 임진(壬辰) ㆍ 병자(丙子)의 국란에 3대(代)가 순국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오씨삼세오충<吳氏三世五忠>,즉 오응정(吳應鼎)과 그의 아들 오욱(吳稶), 오동량(吳東亮) 등 3부자가 임진왜란 당시 남원성(南原城)의 최후방어전에서 장렬하게 산화했으며 또 오응정(吳應鼎)의 3남인 오직(吳稷)(광해조(光海朝) ㆍ 천총(千摠))은 광해조(光海朝) 때 여진족을 징벌하는 전장에서, 그의 큰손자 오방언(吳邦彦)은 병자호란 때 송파(松坡)의 샛강에서 청군(淸軍)과 싸우다 각각 순절했다.
또한 오직(吳稷)은 광해군조에 우영(右營)의 천총(千摠)이 되어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북정(北征)에 참가하여 부차(富車)싸움에서 전사했다.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인조(仁祖)반정을 고비로 중앙정계에 진출, 기라성같은 명현을 배출하면서 명문의 위치를 굳혔다.
인조(仁祖)반정 이후 우 ㆍ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오윤겸(吳允謙)은 당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선조조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이조좌랑(吏曹佐郞) ㆍ 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스승인 성혼(成渾)이 모함을 받아 사직하기도 했으며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9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3배20여 명을 데리고 오는활약을 보였다. 이때부터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었다고 한다.
그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탄핵받았고,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인조반정후 서인(西人)이 분열될 때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大司憲) ㆍ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이괄(李适)의 난(亂) 때는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하였으며, 정묘호란에는 왕세자와 함께 강화(江華)에 피난하였다. 돌아와서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인재등용을 공정히 하는 명재상으로 이름이 났다.
또 그의 조카 오달제(吳達濟)(인조(仁祖) ㆍ 부교리), 손자 오도일(吳道一)(숙종(肅宗) ㆍ 대제학 ㆍ 병조판서), 현손(玄孫) 오명항(吳命恒)(영조(英祖) ㆍ 우의정) 등도 우뚝한 인재들이다. 오달제(吳達濟)는 유명한「병자척화삼학사(丙子斥和三學事)」의 한 사람으로 병자(丙子)호란 때 청군(靑軍)과의 화해를 끝까지 반대하다 청군(靑軍)에 끌려가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온갖 공갈 ㆍ 협박 ㆍ 설득에도 굴복하지 않고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오도일(吳道一)은 한때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문장이 뛰어난 인물이다. 오명항(吳命恒)은 영조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기용되었고,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그밖의 조선조 인물로는 오두인(吳斗寅)(숙종(肅宗) ㆍ 형판(刑判)) ㆍ 서예가로 이름났던 오태주(吳泰周)(숙종(肅宗) ㆍ 해창위(海昌尉))부자가 나란히 대제학에 올라 문명을 떨쳤던 오원(吳援)(영조(英祖) ㆍ 양관대제학)과 그의 아들 오재순(吳載純)(영조(英祖) ㆍ 대제학 ㆍ 이판(吏判)), 오명신(吳命新)(영조(英祖) ㆍ 부제학) 등이 있다.
<삼세오충(三世五忠)>-<병자척화의 오달제(丙子斥和의 吳達濟)>로 이어지는 해주오씨(海州吳氏) 문중의 충의(忠義) ㆍ 투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숱한 우국열사와 선각자를 배출했다.
구한말의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와 오상열(吳相烈), 1907년 을미오적(乙未五賊)을 암살하기 위해 일신회(日新會)를 조직, 무장항일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옥사한 오동진(吳東振),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오세창(吳世昌),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등을 지냈던 오익표(吳翼杓), 한국의학의 개척자요 사회사업가였던 오긍선(吳兢善)(1934년 세브란스 의전(醫專교장), 1920년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문단에 나와 ‘방랑과 참선(參禪)’, ‘애연(愛煙)’등으로 숱한 일화를 남기고 간 괴짜 시인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낸 오화영(吳華英)등은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를 의롭게 살다간 자랑스러운 오(吳)씨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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